한팡밍(韓方明), 신시대 중국 공공외교의선도자
2018-06-25張勁文
글|장진원(張勁文)
한팡밍 정협 제13기 전국위원회 위원, 정협 외사위원회 부주임, 차하얼학회 설립자 겸 회장사진/ 마겅핑(馬耕平)
베이징(北京) 북서쪽 하이뎬(海淀)구다오샹(稻香)호숫가에 위치한 ‘차하얼(察哈爾)학회’ 사업장에서 학회 회장 한팡밍을 만났다. 4기 연속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2008년부터 3기 연속 정협 외사위원회 부주임을맡고 있기도 한 그는 참정·의정의 최고무대에서 다양한 제안을 하고있는 인물이다. 또한 4개 대형 중앙기업과 1개 상장회사의 이사회 멤버를 역임하며 중국 국내외재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으며, 중국국제관계 분야에서 최고의 학술단체인 ‘중국국제관계학회’ 부회장도 맡고있는 저명한 국제관계 학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2012년 싱가포르 남양이공대학과 리엔(Lien)재단이 공동 설립한 ‘리엔잉초우(Lien Ying Chow)기념장학금’을받은 바 있으며, 한국 동국대학교로부터정치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그렇지만 한팡밍,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2009년 세운 씽크탱크 차하얼학회다.
공공외교는 한팡밍의 구학(求學) 인생과 근무 경력을 관통하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중국 공공외교의 변천사를 목격한 뒤공공외교 분야에 투신하여 난관을 극복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그다.
싱가포르를 통해 공공외교를 보다
공공외교라는 개념은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래처스쿨 에드먼드 걸리언 학장이1965년 제시했다. 당시의 공공외교는 주로 미국 공보처가 담당한 비(非)전통적 외교활동을 가리켰는데, 국제라디오를 포함한 정보활동과 교육·문화 교류활동 등이여기에 포함된다.
사실 중국에서는 꽤 오래 전에 공공외교와 유사한 외교형식이 등장했다. 신중국건국 초기 서방국가들의 봉쇄를 깨고, 신중국과 외부세상 간 관계를 열기 위해 노동조합, 청년연합회, 부녀(여성)연합회,중국인민대외문화협회 등 조직은 ‘인민외교’라는 지금껏 없던 외교형식으로 신중국공식외교 발전에 발맞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일례로 1971년 중·미 양국 탁구 선수단 상호 방문에서 유래한 ‘핑퐁 외교’는중미 수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작은공(탁구공)이 큰 공(지구)을 돌린다(小球轉動大球)”는 말을 낳았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돌입한 이후 ‘민간외교’라는 개념이 정식으로 사용됨과 동시에 널리 퍼져나갔다. 민간외교는 그 범위가 매우 넓고, 미디어·교육기관·종교단체·기업·사회 엘리트 모두가 중요한 참여주체가 된다. 한팡밍은 다양한 신분으로민간외교를 직접 경험했으며, 특히 싱가포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한팡밍은 2003년부터 싱가포르 <롄허자오바오(聯合早報)>의 ‘천하사(天下事)’면 ‘명가칼럼’에 ‘일어서서 말하다(站著說話)’라는 코너를 만들고 글로써 독자들에게 중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외국인 독자들은 그의 글을 통해 한팡밍이라는 사람을 알게됐고 중국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한팡밍과 의견을 교류하면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교육외교 역시 한팡밍에게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92년, 싱가포르와 중국이 수교를 하고 2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싱가포르 남양이공대학에 처음으로 중국 관료 해외연수 과정이 개설됐다.이후 2012년, 국경절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갔던 한팡밍은 남양이공대학에서시장 연수 과정을 이수했던 현(縣) 간부를만나게 됐다. 이 현 간부가 관리하는 지역은 허베이(河北)성 북서쪽 바상(壩上)초원에 위치한, 전체 인구가 10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싱가포르에서 배운선진 경영이념을 지방 운영에 응용함으로써 현 전체의 경제·사회 발전 수준을 크게 높였다. “물론 그 지역의 경제·사회 발전 수준이 높아진 것이 오로지 그 간부가남양이공대에서 연수를 받았기 때문만은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연수과정이 현 간부 개인과 그가 맡고 있는 업무에 도움을주고 긍정적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는없을 것이다.” 한팡밍의 말이다.
이러한 공공외교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사회관리제도 혁신과 시장경제 발전을 촉진시켰고,중국과 싱가포르 양국 간 관계에 ‘민심’이라는 힘도 불어 넣어줬다. 이에 대해 한팡밍은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면서 중국 관료들은 싱가포르에 중국 관료집단의 사고방식을 알려주었고, 양국 간 우의 및 협력 발전에 힘을 쏟을 수 있는 많은 ‘지신파(知新派)’ 관료들도 양성됐다. 또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중국의 자신감과 바람을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는 채널을 싱가포르가 갖도록 함으로써 더욱 합리적이고타당한 대중(對中)정책 제정이 가능해졌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싱가포르 공공외교활동의 우수한 예”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 같은 경험은 한팡밍으로 하여금 업무 처리에 있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다.특히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처음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구상을 밝힌 이후 한팡밍은 ‘일대일로’의 ‘5통(五通, 정책소통·인프라연통·무역창통·자금융통·민심상통)’ 가운데 ‘민심상통’이 진정으로 실현되어야 나머지 ‘4통’이 신뢰할 수 있는 보증수표를 얻게 되고,‘일대일로’ 건설 또한 비로소 안정적으로추진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공공외교의 임무임을 확인했다.
중국전력건설그룹 이사 재직 시절 한팡밍은 파키스탄 카심항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기획부터 완공 후 운영까지의 전과정에 참여했다. 카심항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건설은 중국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가 공동 기획하고 중국전력건설그룹과 카타르 왕실이 공동 투자해 건설한혼합소유제 프로젝트로서,‘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건설 계획 중 처음으로 실행된 에너지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2016년 10월 말 한팡밍은 이사회 멤버들과 함께 현지 답사를 떠났다. 그 곳에서 현지 정치인·직원들과만나 ‘일대일로’ 공동건설 및 공유를 바라는 중국의 생각과 ‘해외진출’로 발전과 평화를 추구하는 중국기업의 이념을 소개했다. “현지인들은 우리의 생각을 적극 지지했고, 프로젝트 공동 건설에 참여하기를바랐다. 또한, 나는 기업의 해외진출 과정에서 해외에 파견된 직원들이 중국의 평화발전 이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으며, 이들 역시 공공외교 참여자임을 실감할 수있었다.” 한팡밍의 말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불과 32개월 만에 카심항 가스복합화력발전소 발전기 두 기가 발전에 투입되었으며, 오는6월 말 상업운영을 앞두고 있다.
중국 신형 싱크탱크의 길을 열다
개혁개방 이후 외국과의 민간교류가등장했지만 2009년 전까지 공공외교는 주로 개인간 왕래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규모나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러다 중국이점차 세계에 융화되고 소프트파워 확립이아젠다로 부상함에 따라 공공외교 또한 중국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2009년,중국은 ‘공공외교를 전체 외교의 중요한구성 부분으로 보는 것은 달라진 정세에따라 중국의 외교적 배치를 완비하는 객관적 요구이자 중국 외교 업무의 중요한 개척방향’이라고 제시했다. 이때부터 공공외교는 발전의 전기를 맞았고, 조직화 및 능력 제고 단계에 진입했다. 그리고 한팡밍은 이러한 흐름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한팡밍이 전국정협 외사위원회 부주임을 맡기 시작한 2008년, 잡지를 창간한것은 그의 일생의 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정협 외사위원회는 <공공외교계간(季刊)>을 창간해야 했는데 모두들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가 계간지창간 업무를 맡아서 고향의 차하얼 목장에차하얼학회를 만들었다. 학회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 간행물 발간을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잡지 창간 과정에서 한팡밍은 학회가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여러 회의를 개최해야 하며, 이러한 성과는 단순히 간행물 발간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이에 차하얼학회는 연구영역을 확장하고 연구방향을 충실히 하면서 점차 외교와 국제관계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 씽크탱크가 되었다.
마침 당시는 중국에 씽크탱크 설립이급증하던 시기였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4월 처음으로 ‘중국특색의 신형 씽크탱크’ 건설이라는 목표를 제시했고, 동시에 씽크탱크 발전을 국가 소프트파워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면서 씽크탱크 건설을 국가 전략적 위치로 격상시켰다. 2013년 11월, 중국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중국 특색 신형 씽크탱크 건설과 정책자문제도 건립 및 완비가제시되었고, 중국특색 신형 씽크탱크 건설을 국가 거버넌스 체계 및 경영능력 현대화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한팡밍은 이때부터 중국특색 신형 씽크탱크를 차하얼학회의 발전 방향으로 설정했다.
2014년 초, 차하얼학회는 공공외교사업을 추진하면서 기존에 쌓은 경험을 토대로 ‘평화학’이라는 연구영역을 개척했다.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차하얼학회는 평화를 주제로 여러 차례의 학술행사를조직했고, ‘반도평화연구센터’와 ‘충돌 및화해연구센터’ 등 두 개의 전문 연구기관도설립했다. 2017년에는 ‘일대일로 연구센터’, ‘히말라야 구역 연구센터’ ‘에너지외교 연구센터’를 세웠고, 아프리카 모리셔스에 최초의 해외본부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외자유치’와 ‘해외진출’이 결합한 길을걸어왔던 것처럼, 차하얼학회는 신형 씽크탱크를 건설함에 있어 서방의 유수 씽크탱크의 독립적 이념·조직 구조·제도 설계·자금 운영 메커니즘·직원 연수 및 능력 제고 방법 등을 참고했다.
차하얼학회를 묘사함에 있어 ‘와호장룡(臥虎藏龍)’이라는 표현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 차하얼학회가 주관하고 있는 <공공외교 계간> 총편집장은 자오치정(趙啟正) 전(前)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이자제11기 전국정협 외사위원회 주임이 맡고 있다. 차하얼학회 전문가단 가운데 국제 자문위원회 회원으로는 은퇴한 대사(大使)급 외교관과 해외의 전 정계 요인(무르탈라 모하메드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임창열 전 한국 부총리 등), 세계 저명 학자(‘평화학의 대부’로 불리는 요한 갈퉁 교수 등)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또 수석연구원 및 연구원단에는 중국의 많은 외교및 국제관계 분야 우수학자들이 포함되어있다.
오늘날 중국 씽크탱크는 정부·반관반민·민간이라는 ‘삼위일체’를 형성하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새로운 단계에 올라 있다. 각각의 씽크탱크들은 세부 영역에서 서로 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8년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이 발표한 <2017 글로벌 씽크탱크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에는 현재 512개의 씽크탱크가있어 씽크탱크 수 기준 전세계 2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글로벌 우수정책연구 씽크탱크’, ‘글로벌 최고 외교정책 및 국제사무 씽크탱크’,‘글로벌 최고 국내 경제정책 씽크탱크’, ‘글로벌 최고 국제 경제 씽크탱크’, ‘글로벌 최고 환경정책 씽크탱크’ 등 다양한 베스트 리스트마다 중국 씽크탱크들이 포진되어 있는것으로 조사됐다.
차하얼학회는 중국 사회 씽크탱크의‘리더’로서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례로, 중국국가정보센터의 ‘일대일로 빅데이터 센터’가 2017년 발표한 <일대일로 빅데이터 보고서(2017)>에서 차하얼학회는 ‘일대일로’ 사회 씽크탱크 영향력순위 3위에 이름을 올렸고,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씽크탱크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펜실베니아대학의<2017 글로벌 씽크탱크 보고서>에선 ‘글로벌 최고 외교정책 및 국제사무 씽크탱크’ 분야 중국 순위 5위를 차지했다.
한핑밍은“40년의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중국은 지금처럼 국제사회와 연계할 수있는 많은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은 현재 공식 씽크탱크, 대학 씽크탱크뿐만 아니라 차하얼학회 같은 사회 씽크탱크도 보유하고 있다. 대중과 미디어에 대한 사회 씽크탱크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있으며, 정책 제안 부분에 있어서도 점차전통적 제한을 돌파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반도 안정을 위한 노력들
차하얼학회는 2014년 반도평화연구센터를 설립했지만 이후 불거진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태는 조선반도(한반도) 문제 중 차하얼학회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2016년 7월 한국 국방부가 사드 배치를 선언하면서 중한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사드체계의 핵심 장비인 X 밴드 레이더가 중국 전역을 탐지할 수 있어 중국의국가안보이익을 엄중하게 위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양국의 공식교류와 민간교류는 곧 정체 상태에 빠졌다. 이 같은 배경하에 한팡밍은 차하얼학회의 연구 및 활동중점을 조선반도에 두기로 결정했다. “사회 씽크탱크의 목표는 대중에 봉사하고 정책 결정층에 봉사하고 국가의 외교대국(大局)에 봉사하는 것이다. 중점이 있고 이슈가 있는 곳에 우리 업무의 중점을 두어야한다.” 한팡밍의 말이다.
양국 간 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교류활동을 추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팡밍은 “당시 중한 양국 간 인적·경제 교류 모두 줄어들었고, 공식적소통 또한 상당히 어려웠다”고 털어놨다.그러나 한팡밍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우리는 민간 씽크탱크로서 우리만의 유연성이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해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된다면, 법으로 금지한일이 아니라면 바로 시도해 보았다.”
2016년 8월, 한팡밍은 학회 대표단을인솔해 조선(북한)을 방문, 중·조 공공외교 여정을 시작했다. 중조 최초의 민간씽크탱크 교류 채널이 이때 구축되었는데, 바로‘차하얼 채널’이다. 같은 시기,차하얼학회의 노력으로 중국 TCL그룹과한국 CJ대한통운이 물류 합작법인 ‘CJ스피덱스’를 설립했다. CJ 스피덱스는 이듬해 15억 위안의 매출액을 기록해 그 해중한 양국 경제협력의 대표적 성공사례가되었다.
지난해 차하얼학회는 조선반도 문제에있어 더욱 민첩한 행보를 보였다. 2017년한해 동안 개최한 53개 행사 중 40여 개가조선반도 문제와 관련된 행사였을 정도였다. 차하얼학회 임원진과 연구원들은 쉴 새없이 중한 양국을 오가며 양국 관계에 영향을 주거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주요 인사들과 접촉했다. 또한, 비공식 회의, 씽크탱크 교류, 혹은 우회적 방식을 통해 양국 지방 간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팡밍은 “2017년 나는 한국의 ‘단골 손님’이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한국에 가 각종 행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2013년 12월 18일, 한팡밍은 한국 동국대학교의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진설명) 학위수여식에서 김희옥 동국대학교 총장이 한팡밍에게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 증서를 수여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차하얼학회 제공
한팡밍과 차하얼학회의 노력은 한국정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7년 12월인천시가 한팡밍에게 ‘명예시민’ 자격증을수여한 데 이어 올해 2월 27일에는 노영민 주중 한국대사가 문재인 한국 대통령을대신해‘대한민국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함으로써 장기간 조선반도 평화 및 중한우호 교류 증진을 위한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중국인이 이 같은 영예를 얻은 것은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반도 정세가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2018년, 한팡밍은 또 한번 새로운 관심 포인트를 찾았다. 얼마 전인 4월 22-30일 대표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한 한팡밍은 현지 정계·재계·학계·종교계·씽크탱크·화교(華僑) 인사들과 함께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교류의 시간을가짐과 동시에 ‘인류 운명공동체’ 등 중국의 외교 이념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한팡밍은“중일 관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역시 쌍방의 민심교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조선반도 상황이 점차 호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중점을 일본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한팡밍에게는 한 가지 ‘작은 목표’가있다. 바로 차하얼학회를‘중국의 브루킹스연구소’로 키우는 것이다. 한팡밍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로버트 브루킹스는 브루킹스연구소를 세웠다. 그가 별세한지 86년이 지났지만 브루킹스연구소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씽크탱크로손꼽힌다. 내가 죽고 300년이 지난 뒤에도 차하얼학회가 여전히 건재해 있는 것이나의 목표다.”